사사될때 이의 처리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나타났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선의 차이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9년인 1682년, 윤증이 숙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윤증은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지금의 경기도 과천에 있는
아버지 윤선거의 제자인 나량좌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이에 이소식을 접한 박세채가 바로 윤증을 찾아가게 되지요 이 두사람은 이때에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이때에 윤증은 조정에 출사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3가지의 전제조건을 제시하게 됩니다(숙종실록 10년 계해 5월조)
바로
첫째,남인과 서인과의 화평
둘째,외척의 배제(이른바 3척가로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세외척)
세째,당색이 아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입니다
이때에 박세채 역시 윤증의 이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음을 윤증에게
솔직하게 토로하게 되지요 결국 윤증은 끝내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한 박세채 역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찾지않고
고향인 파산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사실 이때에 숙종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송시열 세사람 이었는데 두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송시열만 조정에 남아있게 되고 말았습니다(그러나 송시열 역시 곧바로 사직 하고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송시열이 주도하던 서인은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습니다
남인의 재기를 막고자 소위 공작정치라 불릴만큼 많은 역모고변 사건을 일으켰었고 척신세력이었던 김석주,김만기 등과 야합했으며
시종 철저하게 자파중심의 인물들만 등용하였던 것입니다(원래종친과 외척은 정치에 관여할수 없습니다)
때문에 윤증은 이러한 서인의 근본적인 개혁없이는 당파간의 화해와 정치발전이란 있을수없음을 지적하였던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서인내에서의 송시열과 윤증,박세채의 인식의 차이는 끝내 분당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재기를
막고자 고변사건을 조작한 척신 김익훈을 놓고 서인의 젊은선비들은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송시열은 오히려 김익훈을 옹호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서인내에서의 사류들간에도 분당의 요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1683년) 이때에 서인의 영수이자 노장이었던
송시열이 노론(老論)이 되고 한때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증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이 윤증을 따르게 되면서
소론(少論)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성향도 노론은 다분히 보수적이었고 소론은 개혁지향적 이었습니다
이때에 노론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민정중,김익훈,이선, 이수언,이이명,이여,김수항 등이 있으며
소론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 남구만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1694년 이른바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은 마침내 장희빈과 남인의 처벌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당하게 됩니다 노론은 적극처벌을
주장하였고 소론은 온건론을 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소론의 대립이 명확하게 표면화된게 바로 앞서 언급했던 1701년 이른바 무녀의 옥 입니다 바로 경종의 생모가 되는 장희빈의
사사문제를 놓고 노론은 감행을 주장하였고 소론은 어쨋든 세자의 생모인만큼 목숨만은 보전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노론과 소론은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지요
동인(東人)이 1589년 기축옥사때 남인과 북인으로 일찍 분당된것에 비하면 서인은 비교적 오랜기간 존속했던 셈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시금 연표로 정리해보면
1682년말 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 상경을 시도
1683년,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이 기존의 서인 당론을 떠나 새로운 시국수습방안(3대 명분론)을 박세채에게 제시함으로써 서인내의 시각차이를 나타냄.
한편 척신 김익훈의 처벌을 놓고 송시열과 젊은 사류들과의 노선갈등으로 노,소론의 분열 계기가 본격화 됨(처벌을 주장하던 많은 젊은 사류들이 윤증을 따름)
이는 그동안 이어져오던 서인의 공통된 시각에 변화와 차이가 발생함을 시사함
1694년,갑술환국이후 장희빈과 남인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파,온건파의 대립이 마침내 노론,소론의 분당으로 이어짐
1701년, 무녀의 옥으로 인한 장희빈의 사사문제를 놓고 노론,소론의 극명한 시각차이를 나타냄,이때에 같은 서인으로서 유지돼왔던 공조체제는 사실상
와해됨. 이당시 노론은 끝내 장희빈의 사사를 방조했고 소론은 어쨌든 세자의 생모임을 인정해 최석정을 비롯하여 장희빈 구명을 시도했으나 좌절됨
덧붙이자면 윤증은 송시열이나 박세채와 마찬가지로 당시에 명망이 대단했었는데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일면식도 없는 선비를 우의정에 제수한것은
윤증이 유일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