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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 윤증고택과 종학당 그리고 노성산성

사회

by 크린맨11 2022. 12. 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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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 때 지어진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ㅁ자 평면의 안채와 동남 모퉁이에 ㅡ자로 지은 사랑채가 붙어있는데 여기에 미닫이, 여닫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구조물이 있어서 옛선인들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사랑의 내루가높게 꾸며져 멀리까지 한눈에 볼수 있다

고택은 옥녀탄금형의 명당자리에 위치하며 사랑채 안쪽까지 뻗어내린 청룡의 맥에 감싸여 한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길모퉁이를 돌면 바로 눈앞에 고택이 나타나고

길 왼쪽 바깥 마당에는 큰 연못이 보인다   (참고문헌: 문화유산으로보는 논산의 발자취 2003.3.25 논산시외)   

 

논산시 해설사는 자랑거리가 너무 많아서 지칠 줄 모르고 설명하십니다  

가장 검소한 양반의 집이며 내루의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다 보는 창의 비율 또한 16:9의 비율로 된 창문이라네요

사계절 내내 시원하고 따뜻한 안채의 구조에 대하여 지금의 과학보다 앞선 지혜가 구석구석에 있어 1시간 넘는 설명에도 부족한 고택입니다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하며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가 합숙하며 교육을 받던 장소이다

종학당에서는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종약에 따라 교육목표를 정하고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1910년 한일 합방 전까지 운영되었는데 합방이후 신교육제도의 도입으로 폐쇄되었다

얼마전엔 건양대학교에서 특강을 마친 구 소련태통령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한국의 미와 곁들인 오찬을 이곳에서 하고 기념식수를 하였다 한다 (2008. 10.2 )

 

파평윤씨 재실(충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299호)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하며 윤세창이 아버지 윤돈의 묘소를 정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파평윤씨 재실인 작은 집은 선조 7년(1574)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고있다

재실은 1630년대 윤순거가 선조들 묘소를 관리하고 지키는 집으로지었던 건물과 덕포공 윤진의 재실을 포함하여 한말에 건립된 영사당, 성경재, 관리사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산으로보는 논산의 발자취 2003.3.25 논산시외) 

 

참고로 종학당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임

 http://ezhistory.org/zbxe/?document_srl=488&mid=news (아래글의 출처)

 

1683년 노론과 소론의 갈림길

기존의 서인당(西人黨)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노론과 소론의 분열은 1701년, 이른바 무녀의 옥으로 장희빈(경종의 생모)이
사사될때 이의 처리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나타났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선의 차이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9년인 1682년, 윤증이 숙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윤증은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지금의 경기도 과천에 있는
아버지 윤선거의 제자인 나량좌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이에 이소식을 접한 박세채가 바로 윤증을 찾아가게 되지요 이 두사람은 이때에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이때에 윤증은 조정에 출사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3가지의 전제조건을 제시하게 됩니다(숙종실록 10년 계해 5월조)
바로
첫째,남인과 서인과의 화평
둘째,외척의 배제(이른바 3척가로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세외척)
세째,당색이 아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입니다
이때에 박세채 역시 윤증의 이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음을 윤증에게
솔직하게 토로하게 되지요 결국 윤증은 끝내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한 박세채 역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찾지않고
고향인 파산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사실 이때에 숙종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송시열 세사람 이었는데 두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송시열만 조정에 남아있게 되고 말았습니다(그러나 송시열 역시 곧바로 사직 하고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송시열이 주도하던 서인은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습니다
남인의 재기를 막고자 소위 공작정치라 불릴만큼 많은 역모고변 사건을 일으켰었고 척신세력이었던 김석주,김만기 등과 야합했으며
시종 철저하게 자파중심의 인물들만 등용하였던 것입니다(원래종친과 외척은 정치에 관여할수 없습니다)
때문에 윤증은 이러한 서인의 근본적인 개혁없이는 당파간의 화해와 정치발전이란 있을수없음을 지적하였던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서인내에서의 송시열과 윤증,박세채의 인식의 차이는 끝내 분당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재기를
막고자 고변사건을 조작한 척신 김익훈을 놓고 서인의 젊은선비들은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송시열은 오히려 김익훈을 옹호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서인내에서의 사류들간에도 분당의 요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1683년) 이때에 서인의 영수이자 노장이었던
송시열이 노론(老論)이 되고 한때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증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이 윤증을 따르게 되면서
소론(少論)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성향도 노론은 다분히 보수적이었고 소론은 개혁지향적 이었습니다
이때에 노론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민정중,김익훈,이선, 이수언,이이명,이여,김수항 등이 있으며
소론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 남구만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1694년 이른바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은 마침내 장희빈과 남인의 처벌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당하게 됩니다 노론은 적극처벌을
주장하였고 소론은 온건론을 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소론의 대립이 명확하게 표면화된게 바로 앞서 언급했던 1701년 이른바 무녀의 옥 입니다 바로 경종의 생모가 되는 장희빈의
사사문제를 놓고 노론은 감행을 주장하였고 소론은 어쨋든 세자의 생모인만큼 목숨만은 보전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노론과 소론은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지요
동인(東人)이 1589년 기축옥사때 남인과 북인으로 일찍 분당된것에 비하면 서인은 비교적 오랜기간 존속했던 셈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시금 연표로 정리해보면

1682년말 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 상경을 시도
1683년,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이 기존의 서인 당론을 떠나 새로운 시국수습방안(3대 명분론)을 박세채에게 제시함으로써 서인내의 시각차이를 나타냄.
한편 척신 김익훈의 처벌을 놓고 송시열과 젊은 사류들과의 노선갈등으로 노,소론의 분열 계기가 본격화 됨(처벌을 주장하던 많은 젊은 사류들이 윤증을 따름)
이는 그동안 이어져오던 서인의 공통된 시각에 변화와 차이가 발생함을 시사함

1694년,갑술환국이후 장희빈과 남인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파,온건파의 대립이 마침내 노론,소론의 분당으로 이어짐
1701년, 무녀의 옥으로 인한 장희빈의 사사문제를 놓고 노론,소론의 극명한 시각차이를 나타냄,이때에 같은 서인으로서 유지돼왔던 공조체제는 사실상
와해됨. 이당시 노론은 끝내 장희빈의 사사를 방조했고 소론은 어쨌든 세자의 생모임을 인정해 최석정을 비롯하여 장희빈 구명을 시도했으나 좌절됨
덧붙이자면 윤증은 송시열이나 박세채와 마찬가지로 당시에 명망이 대단했었는데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일면식도 없는 선비를 우의정에 제수한것은
윤증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노성산성은 노성산에 위치하며 노성산성 사적 제393호

백제시대 축성 둘래 약 894m의 석축으로 거의 완벽하게 쌓은 성터이다

영조때의 기록『여지도서』에 의하면 노성산 봉수는 남쪽으로 은진의 황화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공주 월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해준다고 되어있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4곳이 있고 건물지로 보이는 여러가지 유지가 있으며 동문과 서문이 있었던 곳이 발견되었는데 최근 남문지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연산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방어선에 위치한 산성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노성산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문화유산으로보는 논산의 발자취 2003.3.25 논산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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